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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D.P.R.O.Alge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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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D.P.R.O.Algeria)






◈ 요약

위치 : 북부아프리카 지 중해 연안
면적 : 238만㎢
인구 : 2991만 명(1999)
인 구밀도 : 12.6명/㎢(1999)
수도 : 알제(Algiers)
정체 : 인민공화국
공용어 : 아랍어
통화 : 알제리 디나브 (Algeria Dinar, DA)
환율 : 66.67DA-1달러(1999.10)
1인 당 국민총생산: 3,980달러(1999)

면적 238만㎢. 인구 2991만 명(1999). 인구밀도 12.6명/㎢(1999). 알제리의 정식명칭 은 알제리 민주인민공화국(Democratic and Popular Republic of Algeria). 또 아랍어로는 알자자이르(Al Jumhuryah al Jazairiyah ad Dimugratiyah ash shabiyah)라고 한다. 수도는 알 제이고 아랍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동쪽은 튀니지와 리비 아, 남쪽은 니제르 ·말리 ·모리타니, 서쪽은 모로코와 각각 국 경을 접하고 북쪽은 지중해에 접한다.

1. 자연

알제리는 이른바 마그레브(튀니지·알제리·모로코의 총칭)의 일 부로, 모로코·튀니지와 공통되는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다. 해안 선과 나란히 뻗어 있는 아틀라스산맥의 북사면(北斜面)은 전형적 인 지중해성 기후를 이루기 때문에 강수량이 많고 농경에 적합 한 토지를 이룬 곳이 많다. 그리하여 인구의 90% 이상이 이 지역 에 살고 있다. 아틀라스산맥의 남쪽은 사막을 이루며, 오아시스 와 유전지역 이외는 약간의 유목민이 있을 뿐이다.

2. 주민

알제리 주민의 90% 남짓은 이슬람교도이며 그 밖 에 그리스도교도와 유대교도가 있다. 한때 100만을 넘었던 유럽 인은 오늘날 10만 이하로 줄어들었다. 국어가 아랍어이고 인구 의 대부분은 아랍화되어 있으나, 원주민인 베르베르족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또 사하라사막 지대에는 투아레그족(族) 등, 수단계 아프리카인과의 혼혈부족이 살고 있다.

3. 역사

알제리 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베르베르족이 살았으며, 아틀라스산맥의 북사면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수천년 전 에는 사하라사막도 지금과 같은 사막이 아니었고, 타실리의 바위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흑인계 주민은 농경과 목축을 하 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BC 9세기경에 카르타고 의 지배하에 들어간 무렵에는 사하라는 이미 사막화되어 있었으 며, 나이저강 유역과의 교역이 어렵게 되었다. BC 2세기부터 이 지방을 지배한 로마 제국(帝國)도 내륙에 대한 교역로를 확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7세기에 우마이야드족이 지배하기 시작하 자 이에 저항한 베르베르족이 남하하였으며,
아틀라스산맥 의 남쪽에도 거주자가 생겼다. 그 후 11세기경에 아랍 진출의 제 2파와 알모라비데왕조의 흥성 등으로 이 지역의 이슬람화가 크 게 진척되고 사하라를 경유한 나이저강 유역과의 교역이 활발해 졌다. 1515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알제에 총독부를 두고 세습 적인 총독 데이(Dey)를 임명한 후부터 이 지역은 모로코와 별도 의 역사를 엮어나가게 되었다. 17세기에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쇠 퇴하기 시작하자 이 지역은 투르크의 형식적인 종주권을 인정하 면서도 실제로는 독립국에 가까운 정치형태를 갖게 되었다. 그러 나 이 무렵부터 서유럽 여러 나라가 서아프리카의 기니만(灣) 연 안에 무역기지를 만들고, 해상교역이 활발해졌으며, 이에 따라 사하라사막을 횡단하는 육상교역이 쇠퇴하였다.
중계무역지 였던 이 지역은 타격을 받았고, 해적이 지중해 서부의 선박을 위 협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 해적을 토벌하려는 열강과의 사 이에 전투가 벌어졌으며, 1830년에는 프랑스가 해적기지 제압을 이유로 이 지역에 원정군을 상륙시키고 데이를 격파, 알제를 점 령하였다. 이것이 프랑스에 의한 알제리의 식민지 지배의 시초 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에미르 압델 카데르(Emir Abdel- Kader)를 지도자로 하는 저항이 있었으며, 1837년에는 오란 지방 의 카데르의 세력을 인정하는 등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화는 몹 시 곤란해졌다. 1871년에는 카비리아 지방의 반(反)프랑스 항쟁 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아틀라스산맥의 북쪽은 거의 프랑스의 지 배하에 들어갔으나, 사하라에서의 반프랑스 항쟁은 1930년대에 들어와서도 영화나 문학으로 유명한 외인부대(外人部隊)의 진압 작전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마냥 괴롭히는 상태에 있었다.
프 랑스는 알제 점령 직후부터 토지를 빼앗아 프랑스인 이민(콜롱) 에게 분배해 주었는데, 토지사유제도를 몰랐던 이곳 주민들의 토 지를 뺏은 것이 반프랑스 운동을 격화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기 때문에 19세기 말에는 그 정책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 대 중엽부터 메살리 하디(Messali Hadi) 등을 중심으로 일어난 알제리의 근대적 민족주의 운동은 프랑스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 적 계급투쟁과 결부되어 탄생한 것이었는데, 한편으로 이는 이슬 람교도의 민족주의 운동으로서 이집트와 터키의 지원을 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민족주의 운동은 1945년 알제리에서의 대(對)나치스 독일 승전 축하행사 때 프랑스 국기 대신 민족운동 기를 게양했다는 이유로 프랑스군의 가혹한 무력진압을 당하였 다.
1940년대 후반에 알제리 독립운동은 모로코 및 튀니지 의 독립운동과 함께 마그레브 해방운동이라는 형태를 취하였으 나, 1954년 11월 4일 ‘민족해방전선(FLN)’으로 뭉친 민족주의 운동은 알제리 각지에서 일제히 무력해방 행동을 개시하였으며, 이것이 이른바 ‘알제리 전쟁’의 시발이었다. 프랑스는 그 진압 을 위하여 군사행동을 강화하고, 알제리를 프랑스 본국의 일부로 서 영구히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956년에 독립한 모로코 와 튀니지를 선두로 아랍연맹 가입국은 물론 아시아·아프리카 여러 나라도 사회주의 여러 나라와 함께 FLN을 적극적으로 지원 하였다. 이러한 공세에 대하여 프랑스 정부는 결국 양보할 수밖 에 없었는데, 그 위에 알제리의 프랑스인 콜롱과 군인이 1958년 5월에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마침내 프랑스 제4공화국은 무너지 고 드골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제5공화국이 출현하였다.
1958년 9월에 FLN은 카이로에 ‘알제리공화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며, 아랍제국은 물론 아시아·아프리카 및 사회주의 여러 나라의 승인을 받아 독립투쟁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에 프 랑스 새 공화국 정부도 알제리의 독립을 승인할 수밖에 없게 되 었으며, 페르하트 아바스(Ferhat Abbas)의 임시정부는 본거지를 튀니스로 옮기고 독립방식에 관한 교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알 제리의 프랑스군과 콜롱은 드골 대통령에 반기를 들었으며, 특 히 극우 테러리즘 조직(OAS)의 폭력저항은 파리마저 공황 속에 몰아넣었으나, 1962년 3월에 드골은 벤 헤다(Ben Khedda)의 임 시 행정부를 인정하고 에비앙 협정을 체결, 알제리 독립을 승인 하는 의도를 밝혔다.
1962년 7월, 알제리는 주민투표를 거쳐 독립을 달성하고, 9월에 민주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1963년 에 A.벤 벨라 총리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는데, 그는 범 (汎)아프리카 운동,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반(反)식 민지주의 운동의 지도자로서 국제적으로 화려한 영향력을 행사하 다가 1965년 6월 19일에 부통령 H.부메디엔 대령의 쿠데타로 실 각하였다.

4. 정치

알제리의 부메디엔은 1965 년 쿠데타 후 국회를 해산시키고 FLN의 간부를 중심으로 ‘혁명 평의회’를 설치하고, 그 의장이라는 형식으로 국가원수가 되었 으며, 1976년 12월에는 새 헌법하의 직접선거로 대통령에 취임, 1977년 2월 혁명평의회를 해산하고 다시 국회를 소집하였다. 그 의 정권은 사회주의적인 국가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아랍연 맹과 아프리카 통일기구 안에서도 혁신파·과격파로 평가되어 왔 다. 또 모로코·튀니지·리비아와 ‘마그레브 상설자문위원회’ 를 결성, 공동시장적(共同市場的)인 협력관계를 강화해 왔다.
그러나 에스파냐령 서(西)사하라의 비식민지화 문제를 두고 1975년경부터 모로코·모리타니와 대립하게 되었으며, 그 해 말 에는 알제리가 지지하는 독립안을 양국이 거부하였다. 그러나 독 립을 지향하는 폴리사리오 해방전선은 알제리의 지원하에 모로코 ·모리타니에 대하여 게릴라전을 시작하였고, 1976년 2월에는 알 제에서 ‘살라위 아랍 민주공화국’이라는 국명으로 독립을 선언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알제리와 모로코·모리타니의 적대관계 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알제리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의 일원으로서도 과격파의 노선을 걷고 있다. 1977년 11월에 이 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중동평화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방문하 자 이집트·이스라엘 간의 화평교섭에 강력히 반대하고, 화평교 섭을 배반행위로 보는 ‘거부전선(拒否戰線) 그룹’의 중심적 존 재가 되었다. 1978년 12월에 부메디엔 대통령이 병사하자 민족해 방전선의 특별대회에서 B.샤들리 대령이 후계자로 지명되었는 데, 1979년 2월의 선거에서 제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부메디엔 체제는 중앙집권적인데다 대통령 개인의 권력이 강력했 지만, B.샤들리 대통령은 집단지도제에 의한 정책결정을 방침으 로 하고 있으며, 외교노선도 유연성을 더하고 있다. 1974년 미국 과의 관계회복, 1975년에는 프랑스와 다시 외교를 재개, 구(舊) 소련과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부메디엔 대통령이 1965년부터 투옥했던 벤 벨라 초대 대통령을 1979년 6월에 석방 하였다.
1980년 베르베르족이 아랍어를 공식어로 채택하는 정책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고, 1992년 2월에 는 알제리 전역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하였다. 1994년 1월 리아민 제루알 신임 대통령이 지명되었다. 1996년 국가 통치 기구의 개 혁을 수반하는 헌법을 개정하였는데 상원, 특별법원, 국가운영 위원회의 신설을 포함하고 있고, 대통령의 임기를 5년과 연임 가 능으로 규정하여 권력을 제한하였다. 1999년 아브델라지즈 보우 데플리카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5. 경제

알제 리는 석유수출국기구와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의 주요 멤버 로 경제·산업이 석유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나, 산유국으로서는 낮은 수준이었다. 1955년에 사하라사막 일대에서 풍부한 원유와 천연가스가 발견됨에 따라 그 때까지 포도주를 최대 수출품으로 하고 있던 이 나라의 경제·산업이 크게 변모하였다. 1962년에 독립한 후 석유·천연가스 기업이 모두 국영탄화수소공사 (SONATRCH)의 경영으로 일원화되어 석유 및 천연가스가 총수출액 의 97%(1997) 이상을 차지하였다.
주요 농산물은 포도와 밀 이다. 그러나 농업·목축·임업은 취업인구의 28%(1998)가 종사 하고 있으나 그 생산성은 낮다. 교통운수에서는 4,772km의 철도 망(그 중 약 301km는 電化)과 약 102,424km의 도로망(고속도로 608km포함)이 있으며, 지중해 연안의 알제·오랑 두 항구와 아르 주 등의 석유·천연가스 적출항이 있다.
알제리는 1980~84년 의 5개년계획에서는 기계·차량부속품·전기제품·시멘트·종이 의 생산과 그 밖의 경공업, 주택건설에 역점을 두었으며, 1985~89년의 5개년계획에서는 공업·교육·보건·주택사업·운송 업의 개발뿐만 아니라 공업과 개간사업에 대한 투자를 중요시했 다.

6. 사회

알제리의 독립 후에는 많은 프랑스 인이 출국하였고, 이에 따라 프랑스 자본도 대부분 철수하였다. 그 결과로 실업자가 늘어나 중대한 사회문제가 되었으며, 독립전 쟁 중에 팽창했던 ‘알제리 해방군’ 기타의 군사조직을 정리, 축소해야 할 재정적 요구가 절실했는데도 그 실현이 불가능하였 다. 이것이 군사비 삭감론자 벤 벨라 초대 대통령의 실각 요인 의 하나였다고도 한다. 프랑스로 건너가 노동하는 사람도 40만 명이 넘으며, 이 숫자는 점차 증가하고 있다. 이 나라의 노동조 합은 FLN의 1당제하에서 자율적인 노동활동을 못하도록 억제되 어 있으며, 잠재적으로 민족해방전선 정권에 대한 불만이 많다.
민족해방전선 정권은 국내의 민족적 통일을 강력히 추진하 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아랍 대 베르베르의 인종적 대립과 부족 주의적인 대립이 여전히 남아 있다. 특히 전통적인 농촌에 있어 서는 전근대적인 사회관계가 뿌리 깊게 남아 있으며, 사회구조 의 근대화를 저해하는 조건이 되고 있다. 프랑스 지배하에서의 학교교육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하였으며, 아랍어에 의한 교육 을 금지하였다. 이 때문에 문화의 프랑스화가 모로코·튀니지에 비해 더 심했으며, 식민지 지배 기간이 길었던 이유이기도 하 다. 교육은 비교적 잘 보급되어 있으며, 학령아동의 55 % 이상 이 근대적인 초등학교에 취학하고 있고, 아랍어 교육을 통한 민 족교육이 중시되고 있다. 대학은 알제대학 등 4개교가 있다.

8. 과학기술

알제리는 1997년 현재 단말기기와 이동통신 서비스 외의 모든 통신 서비스가 우편전기통신부(MPT) 에 의해 독점적으로 제공되고 있다. 1966년 UN의 개발도상국 개 발 계획에 따라 국립 전기통신 학교가 설립되었고, 1967년 사하 라 유전을 국내와 국제 통신망에 연결하기위해 약 1,000km의 동 축케이블을 부설하였다. 1997년말 현재 138만 1,342회선을 서비 스하고 있으며, 회선 보급률은 4.74%이며, 본회선의 디지털화도 51.6%이다.
광섬유망은 1997년 현재 총 8,421km를 구축하였 고, 오란, 콘스탄티네, 아나바 등의 주요도시의 동선을 광섬유망 으로 대체하고 있다. 셀룰러 전화서비스는 1989년 시작되었으 며, 가입자수는 1997년 현재 5,200명이다. 인터넷 서비스는 국 가 보안상의 문제로 강력히 통제되고 있으며, 1996년말 현재 28 대의 호스트를 보유하고 있다. 방송사업자는 1997년 현재 국영방 송사인 ENTV와 TDA가 있다.

9. 대한관계

한국 은 1962년 7월에 알제리를 승인하였으나, 알제리는 지속적인 강 경사회주의 정책을 추구하여 UN에서 공산측 안(案)에 찬성하고 서방측 안에 반대, UN군 철수안에 찬성하는 등 반한정책을 고수 하여 1990년에 한국과 수교하였으며, 북한과는 1963년에 수교하 였다. 1997년 하르차오이 알제리 재무장관이 방한하였고, 1997 년 경제과학기술 협정, 1997년 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한국과 는 1990년 1월 16일 국교를 수립하고 건설 부문에 진출하고 있으 며 점진적으로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1998년 대(對)한 수출 5,910만 달러, 수입 1억 8,850만 달러이다. 주요수출품은 알미늄 제품, 광물연료, 화학제품 등이며, 수입품은 섬유, 자동차, 전자 제품, 전기기기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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