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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Jomhuri-ye Eslamiye 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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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Jomhuri-ye Eslamiye Iran)







◈ 요약

위치 : 서남 아시아 페르시아만 연안
면적 : 164만 5258㎢
인구 : 6217만 2000 명(1999)
인구밀도 : 37.8명/㎢(1999)
수도 : 테헤란 (Tehran)
정체 : 이슬람공화국
공용어 : 페르시아어
통 화 : 리얄(Rial)
환율 : 3,000Rial = 1달러(1999.10)
국민 소득 : 500달러(1998)
나라꽃 : 올리브

면적 164만 5258㎢. 인구 6217만 2000명(1999). 인구밀도 37.8명/㎢(1999). 정식 명칭은 이란이슬람공화국(Jomhuri-ye Eslami-ye Iran). 옛 날에는 페르시아(Persia)라고 불렸으나 1935년에 ‘아리아인의 나라’라는 뜻의 이란으로 개칭하였다. 동쪽은 아프가니스탄 · 파키스탄, 북쪽은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서쪽은 터키, 이라 크에 접하며, 남쪽으로 페르시아만(灣), 오만만(灣)을 사이에 두 고 아라비아반도와 마주하고, 북쪽은 카스피해(海)에 면한다.

1. 자연

이란의 국토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중 앙부에 펼쳐진 이란고원과 이를 둘러싼 북쪽의 엘부르즈산맥, 남 쪽에서 서쪽으로 뻗어 있는 자그로스산맥, 그리고 이들 산맥의 바깥쪽을 가로지른 카스피해(海) 연안의 저지대와 페르시아만 (灣), 오만만(灣) 연안의 평야이다. 이란고원은 기복이 심하지 않은 대지상(臺地狀)의 내륙고원으로서 남동부에서는 해발고도 가 극히 낮으며(300m) 북서부로 갈수록 점차 높아진다(1,500m). 엘부르즈, 자그로스의 두 산맥은 알프스, 히말라야 조산대에 속 하는 해발고도 3,000m나 되는 대습곡산맥으로서 화산을 동반하 며, 엘부르즈산맥에 있는 성층화산(成層火山) 다마반드산 (5,604m)은 이란의 최고봉을 이룬다.
카스피해의 수면은 해면 보다 28m나 낮기 때문에 해발고도는 해면 아래에까지 미친다. 이 란고원은 엘부르즈, 자그로스의 두 산맥에 의하여 해역에서 멀 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비는 겨울철을 중심으로 극히 적게 오 며, 기후는 내륙성으로 건조하다. 특히 동부와 중부 지역은 연강 수량이 100mm에도 미치지 못하며, 염성(鹽性)의 카비르사막, 루 트사막이 펼쳐져 있다. 카스피해 연안은 연간 1,000mm 이상의 강 수량을 보이며 동부는 겨울에 비가 많은 지중해성 기후, 서부는 연중 비가 오는 온대습윤 기후를 나타내어 활엽수가 무성하다. 이란고원은 기온의 교차가 크다. 테헤란의 7월 평균기온이 29.5℃인 데 반해 1월은 3.5℃에 지나지 않아 연교차가 26℃에 이른다. 페르시아만 연안과 오만만 연안의 여름은 무더워 45℃ 를 넘는 것은 보통이다.
한편, 엘부르즈, 자그로스산맥의 산 간지대나 북서부의 아제르바이잔고원에서는 겨울의 추위가 극심 하며, 장기간에 걸친 많은 양의 적설을 볼 수 있다. 자그로스산 맥에서 발원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샤트알아랍강(江)에 합류하는 하천으로 카룬강이 있으며, 이란고원에서 발원하여 엘부르즈산맥 에 횡곡(橫谷)을 만들고 카스피해로 흘러들어가는 세피드루트강 이 있다. 엘부르즈, 자그로스 두 산맥지대는 지진대(地震帶)이기 도 하여 가끔 심한 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를 입기도 한다. 국토 의 반 이상이 염성 사막으로 황무지를 이루어 경지율은 낮으며 삼림은 주로 카스피해 주변에 분포한다. 떡갈나무, 너도밤나무 및 활엽상록수가 주종을 이루며 사막지대에서는 내염성 식물을 볼 수 있다.

2. 주민

이란 주민의 대다수는 인 도, 아리아계의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이란인이 차지하고 있 고, 그 밖에 자그로스산맥, 투르키스탄평원 등의 연변부에는 페 르시아어계(語系) 언어를 사용하는 쿠르드인, 루르인, 바흐티아 르인, 발티인, 알타이계(系)의 터키어계(語系) 언어를 사용하는 아제르바이잔인, 카슈카인, 투르크멘인 등 많은 소수민족이 거주 한다. 이들 소수민족의 일부는 유목생활을 영위한다. 도시에서 는 그 수는 많지 않으나 아르메니아인, 유대인도 있다. 공용어 는 페르시아어이며, 문자는 아랍문자를 사용한다. 국민의 대다수 는 이슬람교 시아파(派)에 속하나 수니파(派)도 일부를 이룬다. 아르메니아인은 그리스도교, 유대인은 유대교를 믿는다. 이란인 중에는 조로아스터교도가 약 1만 명 정도 있다.

3. 역 사

이란은 BC 4000년 이전의 선사 유적도 많으나 이란고 원에 최초로 건국한 나라는 에크바타나(지금의 하마단)를 수도 로 한 메디나왕국(BC8∼BC6세기 중기)이다. 이것이 그 후 파르스 지방에서 일어난 아케메네스왕조의 페르시아로서 고대제국으로 는 강대한 세력을 누렸다. 그러나 BC331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정(東征)으로 아케메네스왕조도 멸망하고, 그 후 셀레우코스왕 조, 파르티아제국을 거쳐, AD3세기 초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탄생 하였다. 그러나 아케메네스왕조의 영화를 이은 사산왕조도 651 년 아랍인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그 후 이란은 정치적으로 아 랍에게 지배당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아랍의 영향을 받 아 이란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파할레비 문자 대신 아라비 아 문자가, 조로아스터교(拜火敎) 대신 이슬람교가 보급되기 시 작하였다.
9세기에는 한때 사파르왕조, 사만왕조가 일어났으 나, 11세기부터는 투르크계의 셀주크왕조, 몽골계의 일한국(汗 國), 티무르제국(帝國) 등의 지배가 계속되었으며 1502년 사파비 왕조가 일어나서 강력한 이란민족국가가 부활되었다. 당시의 수 도 이스파한은 ‘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만큼 크게 번영을 누렸 다. 18세기 후반부터는 투르크멘인을 지배자로 하는 카자르왕조 가 창건되어 수도를 테헤란으로 옮겼다. 19세기 초 카자르왕조시 대의 후반에는 러시아의 압박에 굴하였고, 1857년 아프가니스탄 문제로 영국과 싸워 패하였다. 대외적인 패전에도 불구하고 국내 적으로는 전제정치를 강행했으므로 1906년 국민은 이에 반발, 헌 법 제정과 국회 개최를 요구·실행케 하였다.
제1차 세계대 전 중에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국토는 싸움터로 변하였다. 20세 기 초 이란에 진출하고자 하는 영국, 러시아에 눌려 반식민국가 의 상태를 면치 못하였다. 1918년 페르시아-영국조약으로 영국보 호령이 되었으며, 이에 항거하여 이란 카자크 병단(兵團)의 대장 (隊長) 레자한은 무력 정치개혁을 일으켜 카자르왕조를 무너뜨리 고 1925년 스스로 레자샤라 자칭하고, 팔레비왕조의 기초를 닦았 다. 레자샤는 중앙집권제를 실시하는 한편, 치외법권의 철폐, 철 도의 부설, 여성의 차도르 착용 금지 등 후진성 탈피에 노력하였 다. 또한 각종 불평등조약을 폐기하고,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한 편, 서아시아 여러 나라와 동맹하여 유럽세력 배제를 위한 투쟁 을 펴고, 1935년에는 국호를 이란으로 선언하였다.
1941년 부 제(父帝)의 퇴위로 즉위한 무하마드 레자샤는 석유 수입의 증대 를 배경으로 하여 1963년 농지개혁, 문맹퇴치, 중립과 석유외 교, 여성참정권 등을 골자로 하는 ‘백색혁명’을 단행하였다. 1973년 제5차 5개년경제계획 시행 중 석유, ·중공업에 치우친 나머지 보수 시아파의 반(反)팔레비투쟁의 격화로 1979년 1월 팔 레비는 이집트로 망명하였고, 반정부 이슬람교혁명을 주도한 호 메이니는 국민투표를 통해 이슬람공화국 수립을 선언함으로써 실 질적 지도자로 군림했다.
1980년 9월 샤트알아랍수로와 아트 그섬 영유권을 둘러싸고 이라크와 8년간의 전쟁을 치르었으며, 그 결과 국제적인 고립과 막대한 인적·물적·경제적인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전후 국제적인 고립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과 함 께 1989년 호메이니의 사망으로 하메네이가 최고지도자의 지위 를 계승하고, 라프산자니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전후복구 및 경제 사회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실용주의 정책을 채택하였 다. 1997년 하타미 대통령이 취임하에서도 역시 경제난 회복을 위한 개방, 개혁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4. 정치

이란에서는 1979년 회교혁명으로 팔레비왕조가 붕괴되 고 이란이슬람공화국이 수립되었다. 3월 30일 국민투표에 이어, 4월 1일 이란이슬람공화국 수립이 선포되고 최고지도자에 A.호메 이니가 추대되었다. 그 해 12월 2일 국민투표로 채택된 신헌법 에 따라 국가의 최고지도권은 종교법학자인 최고지도자에게 부여 되며, 모든 자유는 이슬람의 원칙에 반하지 않는 한에서만 인정 된다. 이슬람법에 위배되는 법률은 제정할 수 없으며 이를 감시 하기 위해 성직자 및 법조계 대표 12인으로 헌법수호평의회를 구 성한다.
입법권은 단원제 의회인 마즐리스(Majlis)에 속하며 의원정수는 270명이고 임기는 4년이다. 의회와 헌법수호평의회 사이의 의견대립을 조정하기 위해 1988년 2월 최고평의회를 설치 하였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최고지도자 다음가는 지 위에 있으며, 국민의 직접투표로 선출되고 임기는 4년이며 1회 에 한해 연임이 가능하다.
대통령은 총리와 장관을 임명한 다. 지방행정은 21개의 주(州)와 2개의 지방장관구가 있고, 주 밑에 군(郡), 군 밑에 읍과 면이 있다. 지방행정기관의 장은 중 앙에서 임명한다. 사법권은 최고사법평의회에 부여되며 최고재판 소 장관, 검찰총장 및 3명의 이슬람 재판관으로 구성된다. 정당 제도는 사실상 일당제로서 1978년 호메이니가 이끌었던 이슬람공 화당(IRP)이 입법, 행정, 사법의 모든 권한을 장악하고 있었지 만 1987년 호메이니 지시로 IRP가 해체전후 공식적인 정당은 없 다.
1980년 9월 이란-이라크전쟁으로 8년간 소모적인 전쟁 을 벌였으나, 1988년 8월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을 받 아들여 정전을 발효했다. 1989년 6월 호메이니가 사망한 뒤 하메 네이 대통령이 최고지도자직을 승계하였다. 7월 국민투표로 헌법 의 일부 조항이 개정되었고, 후임 대통령에 온건·실용주의자인 H.라프산자니 국민의회 의장이 96%의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었 다. 1992년 4월 총선에서 라프산자니가 이끄는 온건파가 강경파 를 누르고 전체 의석의 2/3 이상을 차지함으로써 입지가 강화되 었다. 라프산자니는 1993년 6월 대통령선거에서 63%의 지지를 얻 어 재선에 성공, 1997년 총선에서 현대통령인 하타미가 69%의 지 지율로 당선되었다.

1) 외교
이란은 팔레비왕조 시 절에는 친미 ·친서방 외교노선을 취해 중동지역의 반공거점으 로 인식되었으나, 1979년 회교혁명 이후 비동맹중립 노선을 취하 고 있다. 1979년 11월 미국 대사관 점거사건으로 대미관계가 극 도로 악화되었으나, 1990년 8월 걸프전쟁에 대해 중립을 취함으 로써 관계개선의 실마리가 마련되었다. 1993년 2월 라프산자니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대미 관계 개선에 관심을 보였다. 러 시아와의 관계는 1983년 5월 공산당을 불법화함으로써 악화되었 으나, 1989년 라프산자니 당시 국회의장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관계개선에 합의했다. 중국, 북한, 쿠바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 고 있으며, 이라크, 이집트, 알제리 등 주변의 아랍국가들과는 여전히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다.

2) 군사
이란은 1979년 회교혁명 이후 군을 재편성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였으며, 1989년 개정된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의장으로 하는 최고안전보 장위원회(SNSC)가 신설되었다. 군대는 16세이상 의무병제이며 복 무기간은 2년이다. 군사조직은 정규군, 혁명군(IRGC)으로 2원화 되어 있다. 1998년 현재 정규군 40만명(육군 35만, 공군 3만, 해 군 2만), 혁명군 20만명(육,해,공군), 민병대 350만(혁명군산하) 명이다. 걸프전 종전 후 라프산자니 대통령은 군비증강계획(軍備 增强計畵)을 발표하고, 러시아에서 잠수함 3척을 도입해 걸프 국 가 중 최초의 잠수함 보유국이 되었다. 러시아, 중국, 북한 등으 로부터 무기를 공급받는다.

5. 경제

국민총생산 이 중동지역에서 가장 높은 이란은 개발도상의 농업국이지만 풍 부한 석유자원을 기초로 한 석유이권료(利權料)와 매상이윤배당 으로 들어오는 막대한 국고수입이 주요 재정수입원이 되고 있으 며, 최근에는 공업발전도 현저하다. 노동인구의 약 33%가 종사하 는 농목업(農牧業)이 이란의 기간산업이지만, 기후와 지형조건 때문에 농경지는 총면적의 10%에 불과하며 휴한지(休閑地)가 많 아 작부면적(作付面積)은 매년 농경지 면적의 1/3 정도에 지나 지 않는다.
특히 이란고원에서의 농경지는 오아시스 주변의 좁은 지역에서만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보링에 의한 지하수 개발 과 트랙터의 보급 등 생산기술의 개선도 약간은 이루어진 편이 나, 농업기술은 아직 낙후된 상태이며, 대토지소유제도가 근절되 어 있지 않기 때문에 생산성이 낮다. 주요한 농작물은 밀, 보 리, 채소, 사탕무, 목화, 포도, 멜론 등이며, 카스피해(海) 연안 에서는 벼, 차, 오렌지의 재배를 볼 수 있다.
국토 면적의 약 1/4에 해당하는 목초지를 가진 이란의 목축업은 농촌의 농민 과 유목민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으며, 산양, 면양, 소 등이 사 육되어 육류, 모피, 유류 등이 상품화되고 있다. 어업으로는 카 스피해에서 산출되는 캐비어가 예로부터 유명하며, 그 밖에 최 근 페르시아만의 정어리, 새우 등의 어획도 수출에 좋은 전망을 보이고 있다.
석유자원은 1908년 영국인 다시에 의하여 자그 로스산맥 남서록의 마스젯솔레이만(灣) 유전이 발견되어 12년부 터 앵글로페르시아(지금의 브리티시) 석유회사가 상업적 채유를 시작하였다. 1951년에는 모사데크 정부가 석유의 국유화정책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것을 계기로 1954년부터 는 브리티시 석유회사 외에 미국, 네덜란드, 프랑스의 여러 회사 들도 출자한 국제재단(컨소시엄)이 발족하여 이권을 계승하였 다. 또 1958년부터는 이탈리아, 캐나다, 서독, 일본 등에도 새 광구(鑛區)의 이권이 주어졌다. 그 후 석유산업을 전면 국유화 한 이란은 현재 세계 제2위의 석유생산국이다.
혁명정부가 등장한 뒤, 1980년 9월 이라크와의 전쟁으로 석유의 생산·수출 량이 크게 감소하였으나 1981년부터 다시 생산을 늘리기 시작하 여 1982년 말에는 OPEC 생산쿼터량의 2배가 넘는 1일 330만 배럴 을 생산하였으며, 1998년에는 260만 배럴로 확대하였고 그 중 68%를 수출하고 있다. 석유 수출에 의한 막대한 재정은 제조업 부분의 신장에 투자되었으며, 1990년 이후 비석유제품의 수출 확 대를 목표로 공업이 활기를 띠고 있다. 주요 공업은 전통적인 직 물을 비롯하여 식품가공, 자동차, 철강 등이며, 아직도 숙련 노 동력과 사회간접자본, 원료 등의 부족으로 공업여건 개선이 과제 가 되고 있다. 이란의 수출품은 석유와 석유관련 제품이 주종을 이루며, 수입품은 기계, 자동차, 화학제품 등이다. 주요 무역상 대국은 혁명 후 미국과의 관계 악화로 독일, 영국, 이탈리아, 에 스파냐, 일본 등 유럽 국가와 활발한 편이다.
육상교통은 산 유국답게 잘 정비된 도로망에 주로 자동차가 이용되고 있다. 원 거리 버스노선도 잘 발달하여 북·서유럽 여러 나라와의 사이에 국제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테헤란에서 서쪽으로는 자동차전용 고속도로가 이어져 있다. 도시교통도 전적으로 택시, 버스에 의 존하고 있기 때문에 테헤란 등지에서의 교통의 마비상태는 대단 하다. 레자샤 시대부터 부설하기 시작한 철도는 테헤란을 중심으 로 페르시아만 연안, 카스피해 연안, 아제르바이잔, 호라산, 케 르만에 통하며 그 연장은 5,000km에 달한다. 터키와는 철도로 연 결된다. 테헤란에서는 자동차에 의한 교통마비를 해소하기 위하 여 서남아시아 최초로 지하철이 건설되었다.
페르시아만 연 안에는 부시르, 호람샤르, 반다르아바스 등의 무역항과 아바단, 카라그 등의 석유수출항이 있으며, 카스피해 연안에는 반다르에 안잘리 상항(商港)이 있다. 테헤란의 메헤라바드 국제공항은 아 시아와 유럽간의 중요한 중계공항으로서 주요국의 항공편은 대부 분 기항한다. 그 밖에 아바단, 반다르에아바스, 시라즈, 자헤단 에 국제공항이 있다. 한편 혁명 후 이란은 국가의 주요산업과 은 행, 보험회사 등을 국유화하고 경제자립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혁 명의 후유증과 대(對)이라크와의 전쟁 피해 복구 등으로 경제적 인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란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은 1990 년 라프산자니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부활시킨 경제개발계획에 기인한다.
라프산자니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계획(1990~94) 을 수립하여 대외적으로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 등 에 경제협력을 요청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천연가스 개발과 석 유화학제품의 수출에 중점을 두고 국영기업의 민영화, 정부보조 금 철폐, 경제의 국제화 등 이란형 페레스트로이카(바르사지)를 추진하였다. 또한 1993년에는 단일환율제도의 채택으로 가격구조 의 왜곡 시정 및 원활한 대외차관 획득을 시도하였으며, 실업경 쟁력 강화와 사회복지 증진을 기조로 하는 제2차 경제개발계획 (1995~2000)을 수립하였다.

6. 사회

이란은 이 슬람교 국가이므로 예배, 단식 등의 종교적 의식이나 돼지고기 금기(禁忌) 등 계율이 엄격하지만 다른 이슬람 국가들에 비하면 자유로워 도시에서는 음주도 가능하고 여성들도 개방적이다. 단 식과 시아파(派) 시조의 애도행사 등은 매년 이슬람력(태음력) 에 따라 거행되지만 일상생활은 춘분(春分)을 1월 1일로 하는 독 자적인 태양력(太陽曆:1년 12개월)에 따라 영위된다. 1943년에 초등의무교육법이 공포된 이래 교육의 근대화가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성년과 미취학아동을 중심으로 한 문맹률이 60% 가까이 에 이르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자로 조직된 교육병단(敎育兵團) 에 의하여 문맹퇴치운동이 활발히 행해지고 있다.
대학은 테 헤란에 테헤란대학·공과대학 등 3개 대학이 있는 외에 아바즈, 마슈하드, 타브리즈, 이스파한, 시라즈에도 대학이 있다. 언론 은 국영 통신사에 의해서 통제되며 주요 일간지 11개가 있다. 보 건·위생 상태가 열악하여 백일해, 성홍열, 장티푸스와 같은 전 염병이 널리 퍼져 있고 유아사망률도 세계 평균을 웃돈다. 국경 지역에 거주하는 소수민족들은 뚜렷한 지방색을 가지는데, 걸프 전 이후 쿠르드족의 자치운동은 내정불안의 소지가 되고 있다. 이들은 국경지역에서 밀무역을 전개한다. 이란은 이슬람문화권 의 중심국으로 이슬람사원을 비롯한 건축예술이 일찍부터 발달하 였으며 전통 수공업으로 만드는 직조 양탄자는 뛰어난 예술성과 장인정신으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명물이다.

7. 문화

이란은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중간지대에 위치하여 동 서문명(Silk Road)의 가교역할을 했으며, 북방 유목민족 문화와 유사성을 강하게 갖고 있으면서도, 인더스-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흡수, 복합문화를 형성한 세계성을 지녔다. 복합민족국가로서 인 종의 다양성에도 불구, 인구의 90% 이상이 열두이맘파의 시아파 이슬람을 신앙하고 있어 이러한 종교적 연대에 의해 국가의 단일 성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적 단일성 때문에 셀주크투르크, 몽골 등 이민족지배에도 동화되지 않았다.
회교 이전의 페르 시아적인 조로아스터교, 노루즈(Nou Roz) 등 고유문화도 회교 문 화속에 융해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회교혁명후 국민 생활의 이슬람화가 촉진되었으며, 금요기도회는 종교행사인 동시 에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일체감과 정치 학습의 기회를 제공한 다. 시아파 최대 종교행사는 아슈라(Ashura)로서 전국가적인 애 도 분위기가 된다.(3대 이만 후세인Imam Hussein이 전장에서 순 교한 날). 라마단(금식월)을 준수하고, 매년 Hajj기간중 8-9만 명의 순례객이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성지를 방문한다.
이 슬람 율법(Islamic Code)은 특히, 남녀의 유별성을 강조한다. 식 생활은 유목, 촌락생활에서 유래한 것이 많으며, 날 것이나 비늘 없는 해산물(뱀장어, 조개 등)을 먹지 않으나, 새우는 비늘이 없 으나 좋아한다. 돼지고기, 개고기는 금기시 되어 있다. 이란인들 은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있으며 훼르도우시 (Ferdowsi), 사디(Sadi), 하페즈(Hafez) 등 뛰어난 시인의 작품 싯귀절을 일상생활에 되새기고 있으며, 이들을 민족적 영웅으로 숭상한다. 이슬람 문명과 회교혁명에 따른 문화, 사회생활은 1997년 8월 카타미(Khatami) 신정부의 '문명간 대화' 통한 개 혁, 개방정책에 따라, 개방화가 계속되고 있다.

8. 과학 기술

이란은 우편전신전화부의 주관하에 국영기업인 이 란전기통신사(TCI)에 의해 국내외 통신망이 운영, 관리, 개발되 어지고 있다. 1876년 전신청이 설립되었고, 1908년 우정성과 전 신성이 통합되었다. 1952년 전화사업이 국유화 되었으며, 국영기 업인 이란 전화사를 설립하였다. 1997년 현재 운영중인 본회선수 는 약 700만회선으로 회선 보급률도 약 13%이다.
1999년 현 재 주요도시를 연결하는 장거리 동선, 동축케이블 등의 시설을 대체할 광섬유망이 구축되고 있다. 셀룰러 전화 서비스는1994년 6월 처음 시작되었고, 1997년말 현재 23만명의 가입자를 확보하 였다. 인터넷 서비스는 1997년 현재 4개 서비스 제공업자에 의 해 제공되고 있으며, 호스트 수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방송사 업자는 1958년 설립된 국영방송사인 이란이슬람공화국 텔레비전 이 있으며, 이란이슬람공화국 텔레비전은 자체 방송국을 1,250 개 소유하고 있다.

9. 대한관계

이란은 남북한 동시수교국이다. 중동 최초로 한국과 교역관계를 이루었는데, 1962년 10월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합의하고 1967년 4월 주(駐) 이란 한국대사관이 설치되면서 우호관계가 긴밀해져 한국의 대 (對)유엔정책을 지지해오고 있다. 북한과는 1973년 4월 수교하였 다. 1973년 10월 석유사태 이후 급격히 증대된 석유 수입을 배경 으로 의욕적인 경제개발을 추진함에 따라 상품교역, 건설, 인력 등 여러 면에서 양국간 협력관계가 급진적으로 확대되어 1975년 8월에는 주한 이란대사관이 설치되었다. 1975년 ‘경제 및 기술 협력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1976년 3월에는 ‘한국-이란 무역협정’이 발표되었다.
그 밖에 한국은 이란과 우호조약 (1969.5), 문화협정(1974.7), 수산협력협정(1988.4), 투자보장협 정(1998) 등 모두 9개 협정을 체결하고 있으며, 한국은 1979년 2 월 새로이 공화국 수립을 선언한 이란을 승인하였다(북한은 1979 년 3월에 승인). 그러나 1981년 7월 이란-이라크전쟁을 계기로 북한으로부터 무기를 도입하는 등 북한과 밀착하여 관계가 냉각 되었으며, 1988년 6월에는 이란 내 한국의 건설현장을 이라크가 폭격하여 한국 노동자 13명이 사망, 37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 생하였다. 1999년 이란 아민자데 외무부 아시아태평양 차관의 방 한을 계기로 정상적인 교역관계를 되찾고 있다. 1998년 현재 대 한(對韓)수입 7억 6,600만 달러, 대한수출 9억 4,400만 달러이 며, 주요수출품은 LPG, 철강, 농수산품 등이며 수입품은 자동 차, 선박, 전자전기제품, 섬유, 철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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